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왕국 (문단 편집) === 부르봉 왕조 ===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부르봉 왕조]]가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소빙하기]]가 끝나고 작황사정이 호전됐고, 명군 [[앙리 4세]]가 국채 경감·농민층의 세금 부담 완화·화폐개혁 등 일련의 경제 개혁 정책을 시도하면서 기반을 탄탄하게 다져놓았으며,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의 통치 시기를 거치면서 프랑스의 경제력은 절정에 오른다. 특히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중동]]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 활발한 교역을 시도해서 무역으로 꽤나 많은 부를 프랑스에 선사했다. [[부르고뉴 공국]]도 [[17세기]] 말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대 군주들이 차곡차곡 쌓은 과실을 따먹은 인물이 바로 [[태양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루이 14세]]. 활발한 대외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의 호화 사치를 핵심으로 하는 루이 14세의 정책은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인두세]], [[소득세]], [[재산세]] 등을 도입한다. 한편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 장관이었던 [[장바티스트 콜베르|콜베르]]는 각종 공업을 왕실 차원에서 유치하면서 외국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보호무역]]를 실시하여 외국 상품의 프랑스 침투를 적극적으로 견제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앙으로의 세금 징수 및 전국적인 물산 유통의 원활화를 위해 프랑스 전역으로의 교통망을 정비하기 시작한 것도 콜베르의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루이 14세가 워낙 돈을 흥청망청 써댔고, 특히 전쟁을 통한 영광에 집착한 왕의 행보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이어졌다.[* 통념과 달리 배르사유 궁전 건축은 재정 지출의 5% 미만으로 그리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60만에 달하는 상비군과 전쟁으로 인헤 75%를 상회했던 군사비 지출.] 다만 통념과 달리 [[낭트 칙령]]의 폐지와 위그노의 이탈은 큰 타격이 아니었다.[* 루이 14세의 퐁텐블로 칙령(낭트 칙령 철회)는 선왕 시기부터 각종 특권을 두고 왕실과 대립하던 위그노 탄압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탄압의 결과물을 선포한 것이며, 프랑스에서 위그노가 유출되는 만큼 개신교권에서 반대로 유입되는 인구도 상당하였다.] 결국 루이 14세의 사망 무렵(1715)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루이 15세]] 시기에는 경제가 느리지만 천천히 회복되는가 싶었다.[* 화폐가치의 안정이나 생산과 인구 같은 내용을 이런 시기에 연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것들은 정책적인 사안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다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 [[물가]]의 상승과 임금의 상승은 서로 상쇄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비교가 잘못되었다.] 그런데... '''루이 15세 말기 [[7년 전쟁]]이 터지면서(1756) 경제 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7년 전쟁으로 빚은 빚대로 졌는데, 전쟁까지 지면서 [[북아메리카]]와 [[인도]]의 식민지 대부분을 잃으면서[* 그나마 당시 [[설탕]]과 [[커피]] 수출로 프랑스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던 [[아이티|생도맹그]] 등의 [[카리브해]]의 섬들은 건지는 데 성공해 최악은 면했다.] 프랑스의 경제는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에서도 라이벌 [[영국]]을 어떻게든 엿먹여보겠다고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면서 프랑스의 재정적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물론 신생국 [[미국]]이 승리하면서 목적은 달성했지만, 이 시점에서 정부의 부채는 이미 통제 내지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버렸고(...) 계속해서 흉년이 일어나고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중들, 특히 수도 [[파리(프랑스)|파리]]의 [[빈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당시 군주인 [[루이 16세]]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재정 총감 [[자크 네케르]]를 등용하면서 세제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본인의 우유부단한 성격 탓에 결국 개혁의 마지막 노력들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앙시앙 레짐|수백 년에 걸쳐 쌓인 프랑스 왕국의 모든 모순]]과 불만이 폭발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 퇴위하자 [[루이 18세]]가 즉위함으로 [[부르봉 왕정복고|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밀려 잠시 부르봉 왕조가 종식되고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워털루에서 패배]]하여 다시 퇴위한 이후 루이 18세가 복위했으며 그의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함으로 십여년간 [[부르봉 왕조]]가 지속되었으나 샤를 10세의 시대착오적인 [[전제군주제]] 복구 시도가 결국 [[7월 혁명]]을 촉발하여 샤를 10세는 퇴위하고 방계인 [[루이필리프]]가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필리프도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로 인해 [[2월 혁명]]으로 퇴위, 이후 프랑스는 [[프랑스 제2공화국|제2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